사진과 자꾸2012. 5. 14.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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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민속자료 제200호, 대구 달성조길방가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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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시 4분. 지금부터는 달성조길방가옥 가는 길입니다. 입구는 경사진 좁은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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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 어느 주택 뒷마당에서는 도시에 사는 친척들이 오랜만에 모여 삼겹살구이 파티가 벌어진 모양입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삼겹살 냄새와 함께 들려옵니다. 연기가 보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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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시 8분. 가창면 정대리 청룡암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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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 비, 큰 거문고 슬, 비슬산 청룡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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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원보호구역인지라 물이 정말 맑고 깨끗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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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시 16분. 조길방가옥 갈림길. 왼쪽 오르막길이 조길방가옥 가는 길입니다.

오른쪽 곧은길이 아마도 우록 쪽으로 넘어가는 길이지 싶은데, 다음번에 저 길로 한 번 가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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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시 23분. 좀 전 갈림길부터는 계속, 끝까지 오르막길입니다.

길 오른편에 있는 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250년 느티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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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시 32분.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마을 앞 주차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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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중앙에 초가가 보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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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보이지 않는 안채 포함하여, 총 4채의 초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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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조길방가옥 (達城趙吉芳家屋), 중요민속자료 제200호.

소재지 : 대구 달성군 가창면 조길방길 92-1 (정대1리)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 함안조씨 동계공파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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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길방 가옥은 해발 800m(450m로 수정되어야 함) 정도의 높은 산간마을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남아있는 6호 중에 가장 오래된 집이다. 원래 대구 동촌비행장 근처에 살고 있다가 9대조 광국(光國) 대에 가화(家禍)를 당하여 홀로 이곳으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안채는 정착 당시인 1784년경에 건립하였으며, 사랑채는 1925년경 확장하고 아래채는 1955년경에 무너진 것을 다시 지었다.

안채는 높은 축대 위에 앉아 있고 그 앞의 낮은 마당 좌, 우에 각각 아래채와 사랑채가 마주보고 있다. 사랑채 뒤편 건물은 헛간채이다. 안채는 남부지역에서 주로 찾아 볼 수 있는 평면구성으로 좌로부터 부엌, 큰방, 대청, 건넌방 순으로 놓여 있다. 대청에서 큰방과 건넌방으로 통하는 키 작은 문과 큰방 앞의 앙증맞은 문은 드나들기가 어려울 정도의 작은 문이다. 이들 문은 상류주택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초가의 전형적인 창호로 옛 모습을 잘 간직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는 1칸 헛간과 2칸통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래채는 좌로부터 방앗간, 곳간, 온돌방, 외양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옥은 흔치 않은 오래된 조선시대의 귀한 초가로 안채 평면구성은 남부지방 서민주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질박한 초가의 참 모습을 읽게 하는 안채의 작은 창호가 눈길을 끈다.

현 소유자의 먼 웃대 조상은 대구의 동북방(東北方)에 있는 동촌(東村) 비행장 근처에 살고 있었으나 9대조 광국(光國)(1708∼1776)대에 가화(家禍)를 당하여 총각의 몸으로 이곳 한덤(대암(大岩))에 숨어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다하며 안채는 이때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깊은 산골의 해발 약 800m 되는 경사가 비교적 급한 산간마을로 옛날에는 15호 가량 살았으나 현재는 6호만 남아 있다. 이 마을에서는 이 집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 한다.

마을이 숨듯이 들어앉은, 산 전체가 서향으로 경사져 있어서 집들은 자연히 서향하게 되었다. 본 가옥의 안채는 잡석으로 높이 쌓은 축대 위에 서향으로 앉았고 좌측으로 축대를 연장시켜 부엌 곁에 장독대를 갖추었다. 축대 앞의 낮은 안마당에는 좌우에 아래채와 사랑채가 마당을 중심으로 부속건물처럼 낮게 대향(對向)하여 배치되어 있어서 상대적으로 안채의 비중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안채는 남부형(南部型)에 속하는 평면구성으로 2칸 마루의 좌측에 큰방과 부엌을, 우측에 건넌방을 배치하고 있다. 자연석 주초(柱礎)에 방주(方柱) 세우고 방 주위는 토벽(土壁)을 쳤는데 마루의 전면 중앙기둥만 원주(圓柱)를 사용하였다. 원주의 윗머리에는 주두(柱頭)나 보아지 없이 보를 바로 얹었고 삼량가(三樑架)에 동자주(童子柱) 대공(臺工)을 세운 간소한 구조로 되어 있다. 현 소유자의 부친은 이 집이 “싸리기둥에 칠기봇장(칠기나무로 된 보) 집”이라고 늘 마을 사람들에게 자랑하였다고 하는데 그 기둥(원주)도 밑부분이 부식하여 끊어내고 이어서 받쳐 놓았다. 마루에서 큰방과 건넌방으로 출입하는 외여닫이 궁판 세살문은 높이가 매우 낮아서 몸을 구부려야 드나들 수 있고 특히 안방 전면벽에 낸 외여닫이 살창문은 그 크기가 매우 작아서 출입 보다는 채광과 통풍에 뜻을 두고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건넌방 전면벽에도 40여년전에는 같은 형식의 작은 살창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사랑채는 방 2칸과 도장 1칸으로 되어 있으나 소유자의 부친이 60여년전에 확장한 것이라 한다.

아래채는 원래 우측에서부터 마굿간, 방앗간, 방의 순서로 3칸집이었으나 30여년전에 무너진 것을 지금과 같은 간살로 개조하였다고 한다.

본 가옥은 초가로는 드물게 보는 오래된 유구로 특히 안채의 개구부(開口部)의 규모와 성격은 주택발달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 문화재청]


P 영원파님의 파란블로그에서 발행된 글입니다.

Posted by 영원파